윤상원을 만든 이태복! 역사를 바꿨습니다
김상집 사) 5.18구속부상자회 광주시지부장
41년 전 민중혁명을 꿈꾼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80년 5월 1일 노동절을 기념하여 인천시 북구 계산동 홍진아파트에서 이태복, 김병구, 유동우, 양승조, 신철영, 박태연, 윤상원이 참석한 가운데 전국민주노동자연맹 중앙위원회 결성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박정희가 죽고 비상계엄이던 당시 민주주의와민족통일을위한국민연합은 개헌을 통한 국민투표 곧 대통령 선거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반면 전민노련은 비상계엄 치하에서 국민투표 선거는 없다고 보았고, 민주정부 수립은 조직된 청년학생과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이 함께 연대하여 투쟁하지 않고서는 실현하기 힘들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태복과 전민노련은 현장중심론에 빠지지 않고 노학연대를 적극 주장하였으며, 나아가 모든 민주세력이 연대하여 80년 ‘서울의 봄’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신념을 강하게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5월 15일 대략 15만 명의 학생시민이 운집했던 서울역 집회에서 국민연합은 ‘소요사태로 계엄당국이 개입할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시민학생들의 열화와 같은 민주정부 수립 요구가 대규모 군중집회로 이어지자 다급해진 국민연합은 이해찬·김병곤 등을 보내어,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유시민 등 학생지도부를 대우빌딩 안으로 불러들여 ‘서울역 회군’을 종용하게 하였습니다.
당시 전민노련·전민학련은 서울역 현장에서 이선근 등 학생들에게 광화문까지 진출해 미국에게 ‘군부출동 저지’와 ‘선거보장’을 요구하라고 지시했으나, 국민연합측의 선거론에 밀려 손을 쓰지 못했습니다. 집회를 주도한 심재철, 김부겸 등은 광화문까지 나가서 미 대사관을 둘러싸는 것은 북한 간첩이나 하는 짓이라며 발언을 막았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당시 투쟁을 위해 결성되어 총지도부 역할을 하였던 학생대표단의 결의를 거치지도 않고 회군을 강행케 한 반민주적인 모략으로 5월의 투쟁을 무산시켜버린 것입니다.
이른바 보수야권과 재야청년세력의 선거전략에 따른 서울역 회군 결정이 나면서 신군부에게 탄압 기회를 주고 만 것입니다. 이 서울역 회군은 결국 신군부의 계엄확대와 시위주동자 체포령으로 서울의 봄을 끝장내게 하고, 광주학살의 여건을 조성하고 말았습니다.
국민연합은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이하여 대통령선거를 국민투표로 실시할 것을 염두에 두고 전국적인 지부를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중혁명에 뜻을 두고 전민노련 활동을 하고 있는 윤상원에게 재야청년운동권의 수장인 윤한봉은 전남국민연합의 사무국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윤상원은 이태복과 상의해야 한다며 거절하자 윤한봉은 4월 말 광주양서조합 골목길 포장마차에서 이태복을 만났습니다.
윤한봉이 “윤상원이 이태복의 동의가 있어야 전남국민연합의 실무를 맡겠다고 하는데 동의해 주시오”
라고 말하자,“우리는 이번 선거가 가능하지 않다고 봐요. 국민연합 측에서 헛물을 마시는 것 같네요. 선거가 가능하다는 착각은 하지 마세요. 그러나 공개활동도 좋습니다. 찬성합니다.” 이렇게 윤상원은 전남국민연합의 실무를 맡게 됩니다. 이태복의 노학연대 신념은 윤상원을 선거와 민중혁명이라는 상반된 흐름의 중심에 두게 한 것입니다.
윤상원은 전라민중무장봉기에서 재야수습위와 학생수습위를 넘나들며 마침내 민주투쟁위를 만들어 결사항전을 이끌다 장렬히 전사합니다.
1980년 광주시민의 민주항쟁을 유린하고 등장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자, 총력 투쟁을 앞 둔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국민주청년연맹·전국민주학생연맹의 중앙위원들은 5·18민중항쟁 1주기를 맞이하여 81년 5월18일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의 이태복·양승조·박태연·김병구, 전국민주청년연맹의 선경식·채광석·심지연·김철, 전국민주학생연맹의 이선근과 시민군 김상집이 참석해서 윤상원과 광주영령들을 위한 추모식을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거행합니다.
그러나 이태복은 1981년 6월 초 혜화동 로터리에서 불시에 연행되었고, 학림사건은 핵심 활동가 28명만 구속되고 학련 500여 명, 노련 350여 명 관련자는 석방 후 제적, 해고되었습니다.
1982년 결심공판에서 이태복은 사형, 이선근은 무기징역을 구형 받았고 재판부는 공소장을 그대로 인정해 이태복에게 무기징역, 이선근에게 10년 형 등을 선고했습니다.
7년 4개월의 길고 긴 수감생활을 마치고 1989년 10월 ‘주간노동자신문’과 10년이 지난 1999년에는 일간지 ‘노동일보’, 그리고 2002년 보건복지부 장관직을 맡게 되고 이후 5대거품빼기운동을 하였지만, 어찌 보면 이태복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에 뿌리를 둔 흥사단 시절부터 자신의 삶을 관통해 온 ‘실천론’을 이어온 것입니다.
지난 9월 23일 부산에서 출발한 ‘글과 수묵, 사진으로 만나는 임을 위한 행진곡 윤상원’ 전국순회전시는 울산과 서울을 거쳐 수원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윤상원의 삶에 이태복과 학림의 노학연대가 알려있지 않았습니다. ‘글과 수묵, 사진으로 만나는 임을 위한 행진곡 윤상원’ 전국순회전시를 통해 윤상원의 삶을 재조명하고자 동분서주하던 윤상원기념사업회이사장 이태복은 12월 3일, 과로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윤상원은 5·18광주민중항쟁 기간 동안 이태복과 광주 상황을 주고받았을 뿐만 아니라, ‘전남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사무국장의 역할도 이태복의 동의를 받고 수락했을 정도로 윤상원은 전민노련 중앙위원의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원칙주의자였고 민중혁명의 꿈에 불탔던 윤상원은 5·18광주민중항쟁 기간 동안 전남국민연합 사무국장과 전민노련 중앙위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고립무원의 광주에 극히 적은 시민군과 함께 남아 민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죽는 순간까지 결사항전한 것입니다.
윤상원과 시민군의 결사항전은 살아남은 자를 죄인으로 만들었고 6월 민주항쟁과 촛불혁명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전민노련·전민청련·전민학련을 이끌었던 이태복이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을 만들었고, 마침내 역사를 바꾼 것입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이태복 형!